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문단 편집) === 뤼베크 === 1668년 북스테후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뤼베크]]에 있었는데, 아마 뤼베크 성 마리아 교회의 후임자에 도전하러 온 듯 한데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이시기에 [[한자 동맹]]으로 부유해진 뤼베크는 한자 동맹의 몰락에 따라 휘청거리기 시작했고, 성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은 잦은 고장을 일으켰다. 또한 봉급도 높은 편은 아니었다.] [[프란츠 툰더]]가 1667년 11월 5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북스테후데는 4월 11일에 뤼베크의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었는데, 이미 3월 16에 헬싱보리의 성 마리아 교회에서 북스테후데의 후임자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 전부터 북스테후데가 이 자리를 원했음을 알 수 있다. 7월 23일에 북스테후데는 뤼베크 시민권을 획득하고, 8월 3일에는 전임자 툰더의 딸 안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바흐]]나 [[헨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뤼베크의 성 마리아 교회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북스테후데는 전임자의 딸이 마음에 들었는지 결혼을 했지만, 젊은 바흐나 헨델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금슬은 좋았는지 북스테후데 부부 사이에는 7명의 딸을 두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북스테후데는 은퇴한 오르가니스트인 아버지와 가족을 데리고 뤼베크로 이사를 왔다. 요한 북스테후데는 뤼베크에서 6년을 더 살다가 167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성 마리아 교회 지하에 안장된다.] 이때 북스테후데가 직접 장례식 음악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1674년에 요한 포르호우트가 음악가들의 단체 초상화를 그렸는데, 여기 그려진 북스테후데가 남아있는 그의 유일한 초상화라고 한다. 또한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북스테후데는 교회 재무 담당도 겸직하게 되었다. 북스테후데는 교회음악 말고도 자율적으로 전임자 [[프란츠 툰더]]가 시작한 저녁 음악회 '아벤트무지크'(Abendmusik)[* 독일어로 '저녁음악'.]를 지휘하는 일에도 열심이였다. 매주 [[일요일]]에 열리는 이 음악회는 전국적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북스테후데는 원래 비정기적으로 열리던 이 음악회를 1678년부터 정례화하였으며 1700년경에는 프로그램을 더욱 체계화하여 매 해마다 [[크리스마스]] 전인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5개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매주 일요일 저녁에 공연하도록 하였다. 이 아벤트무지크는 1810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또한 북스테후데는 무엇보다 오르가니스트로 명성을 드높였는데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도 힘썼다. 1681년에는 니콜라우스 브룬스가, 1684년에는 게오르크 디트리히 다이디히가 제자로 들어왔다. 제자 말고도 당대의 쟁쟁한 음악가들과도 교류를 나누었다. 예를 들면 당대 북스테후데와 쌍벽을 이루는 오르간의 [[본좌]] 요한 아담 라인켄. || [[파일:20160210_125019.jpg|width=330]] || ||파헬벨의 <아폴로의 육현> 초판본.[br]Dietr. Buxtehude라고 북스테후데에게 바치는 헌사가 적혀있다.|| 또한 [[요한 파헬벨]][* 카논으로 유명한 그 파헬벨 맞다.]도 1699년 자신의 건반악기 모음집인 《아폴로의 육현Hexachordum Apollinis》을 북스테후데에게 헌정한 것으로 보아서 파헬벨과도 교류가 있었던 듯 하다. 1687년에는 오르간 제작자 아르프 슈니트거의 오르간을 테스트하러 [[함부르크]]로 여행을 다녀오는 등 [[바흐]]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오르가니스트의 본좌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